
조선시대는 은본위의 화폐시스템을 갖고 있었다.
금본위인 현대와는 달리, 실질적인 화폐가치는 은을 기준으로 삼았고, 금은 귀금속, 장신구, 권력층의 부를 상징하는 수단으로만 쓰였다.
금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는, 생산이 극히 제한적이었고, 그 적은 생산량의 전량이 왕실의 보물이나 외교적인 선물로만 쓰였기 때문이었다. 반면에 은은 함경도·평안도 등지에서 제법 산출되었다고 한다.
금, 은, 동의 가치를 비교하자면 아래와 같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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금속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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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준단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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상대가치(은 대비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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비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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금(金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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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냥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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은 10~15냥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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귀금속, 유통 안 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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은(銀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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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냥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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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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실질 화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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동(銅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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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냥 상당량 = 약 1,000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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은 1냥 ≈ 1,000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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소액 거래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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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냥의 금은 은 10~15냥의 가치를 가질 정도로 너무 고가라 일상 화폐로는 쓰기 어려웠다고 한다. 쌀 한되를 사는데 은 1냥이면 충분한데, 금은 10배 가치이니 비효율적이었다는 것.
그렇다면, 대충의 물가를 짐작해보기 위해 조선 중기 광해군 시대 은 20냥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어떤 것이 있었을지 짚어보는 걸로 당시 화폐 가치를 알아보도록 하자.
1. 은 20냥 = 서민 한 가정의 '큰 돈'
조선 중기에는 일반 백성의 연간 현금 수입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. 농민의 경우, 세금과 공납을 제외하면 현금 수입은 2~5냥 정도에 불과하여, 은 20냥이라고 하면 평민 4~10년치 순수 현금 수입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.
2. 혼례 비용
평민의 혼례는 5~15냥 정도면 가능했으며, 신분이 좀 있는 양반가는 30~50냥이 들기도 했다. 즉, 은 20냥이면 평민 가정은 혼례를 치르고도 남는 돈이었다.
3. 노비 매입
조선 중기 노비 한명의 시세는 남자노비 약 10~15냥, 여자 노비는 8~12냥이었다. 은 20냥이면 노비 1~2명을 살 수 있었다.
4. 집과 토지
지방 읍성 근처의 초가 한채(대지 포함)은 약 10~20냥 수준이었다.
5. 식량 구매력
20냥이면 약 쌀 20가마니(약 1,600kg)를 구매할 수 있었는데, 보통 4인 가족이 1년 동안 먹는 쌀이 약 12~15가마니이니, 한 가족의 1년치 식량 + 여분 정도를 구매 가능한 금액이었다.
6. 군역 면제나 뇌물 수준
당시 군포 한 필이 약 1냥이었다. 일부 부유한 농민들은 군역을 피하려고 10~20냥의 뇌물을 쓰기도 하였다.
시기별로 달랐지만 평균적으로 은 1냥에 엽전 800~1000문, 즉 엽전 1천개가 은 1냥 정도의 가치였다. 엽전은 무겁고 신뢰도가 불안정했다. 조선 후기에는 엽전 주조 남발로 가치가 폭락했고, 시장에서는 은의 중량 기준 거래(은 냥 단위)가 더 신뢰받았다. 그래서 실제로 조선 후기 상인들은 엽전을 은 냥 단위로 환산해서 장부에 기록하였다고 한다.
이상 조선 중기시대의 화폐가치를 은화와 엽전의 차이, 실제 해당 가격으로 할 수 있는 일들로 살펴보았다.
쇳덩이를 한아름 들고 물물교환하던 시절에서 시장경제가 발전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. 화폐가 개혁되고 기술개발이 일찌감치 있었다면, 그 시절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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